구약의 말씀은 대부분 히브리어로 기록되어 있다. 다니엘서 일부와 에스라서 일부만 아람어로 기록되어 있다.
히브리어는 아람어의 방언이고 히브리어와 아람어는 셈족 계열의 언어이다. 히브리어 자음은 아람어의 자음에서 차용했다. 히브리어와 아람어의 알파벳은 완전히 같다. 그래서 역으로 히브리어를 배우면 아람어도 쉽게 배울 수 있다. 이런 연유로 구약의 말씀을 원어로 읽기 위해서는 먼저 히브리어를 배워야 한다.
그러나 히브리어를 배우는 것은 만만치 않다.
히브리어를 익히는 데 있어서 우리를 어렵게 만드는 것은 결국 두 가지로 압축된다.
첫 번째는 히브리어의 알파벳이 기이하게(?) 생겼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히브리어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어 나가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 익숙해지면 괜찮을 것 같다가도, 결국 이 두 이유가 어려움의 근원이 된다는 사실을 다시금 발견하게 된다. 여기에 하나 더 추가하자면, 마소라 학파가 만든 모음 기호도 만만치 않다. 보통 점으로 표시되는 모음들은 자음 밑과 자음 위에 붙어다니며, 기본 자음이 변할 때 모음들도 자음을 따라 춤을 추며 변형된다.
위 이미지의 히브리어를 읽기 위해서는,
첫째줄 오른쪽에서 시작하여 왼쪽까지 읽은 다음, 두번째 줄에서 다시 오른쪽에서 시작하여 왼쪽까지 읽어야 한다.
한글 음가로 그대로 적으면, "비루크 아타 드 엘로헤누 멜레크 히올람 아쉐르 / 키드쉬누 베미쯔보티브 베찌부누 레히트하테크 베찌찌트"이다.
위 이미지 구절과 일치하는 히브리 성경 구절은 없다.
둘째 줄을 먼저 해석하고, 그 다음 첫째줄을 해석하면, 이 구절의 뜻은...
"그의 계명으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며, 우리의 옷술(tassel)을 움직이도록 우리에게 명령하신 / 영원하신 왕 우리의 하나님이 너에게 복주시기를 원하노라"이다.
그러나 히브리어가 마냥 어렵기만 한 것은 아니다.
지난한 과정을 거치다보면 어느 순간 익숙해지고, 사전을 찾을 수 있는 능력도 배양되어, 결국 성경에 없는 구절인 위 이미지에 있는 히브리어 글귀도 해석이 가능해진다. 결국 시간과의 싸움이다. 이런 점에서 언어는 매우 정직하다. 어떤 언어를 사랑하고 그리하여 친숙해지면 어느 순간 그 언어가 원래 태어날 때부터 자신이 알고 있었던 것으로 착각이 되기도 한다.
성경을 사랑하는 자라면, 한글과 영어로 번역된 성경을 넘어, 성경의 일차 언어인 구약의 히브리어와 신약의 헬라어를 배우고 싶은 욕망이 자연히 생겨난다. 이런 점에서 어떤 그리스도인은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향한 갈망이 평생토록 그림자가 되어 따라다닌다. 눈에 보이는 밥줄을 주는 실용적인 언어를 제쳐두고,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공부한다는 것은 분명 시대에 역행하는 것이다.
중세시대에 종교개혁이 일어난 원동력 중의 하나가 종교 개혁자들이 히브리어 성경과 헬라어 성경을 읽었기 때문이라고 진단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경각심이 종종 울려퍼지나, 항상 그렇듯이 실용성을 찾는 현실 앞에서 그런 경각심도 여지 없이 잠식된다.
무엇인들 안 그렇겠는가?
그럼에도 어떤 사람들은 자본주의 실용성을 넘어 히브리어와 헬라어로 인쇄된 지면을 손과 눈으로 짚으며, 그리하여 히브리어와 헬라어가 그의 혈관을 타고 들어오는 전율을 느낀다.
개인적인 주관과 감정에 휘둘려 울리는 설교자의 설교가 아니라, 순결하고 정금 같은 하나님의 말씀에 끌리는 전율의 맛을 본 사람들은 시대를 역행할 수 밖에 없다.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그 말씀을 주신 하나님을 사랑하지 말라고 해도,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를 위해서 죽으셨고 부활하셨다고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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