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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관련

지금 이 시대에, 누가 헬라어(그리스어)를 배우고 싶은가?...

신약은 헬라어로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의 제자들은 신약을 헬라어로 기록하였을까? 헬라어는 예수님 당시 로마제국의 국제 언어이다. 로마제국은 제국의 언어인 라틴어보다 그리스인들이 사용하는 헬라어를 국제 공용언어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Nesle-Aland NTG(27판)


이것은 역사적인 추이이다. 로마가 지중해의 판도를 잡기 전,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확장된 헬라제국 때문에 헬라어는 이미 국제언어가 되었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제자들도 다른 언어 대신 헬라어를 택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처럼 국제언어인 헬라어로 신약이 기록된 것은 그 자체로 초대교회의 선교정신을 시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도 헬라어를 사용하셨을까? 학자들은 예수님이 아람어 뿐만 아니라 헬라어도 당연히 사용하셨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오늘날 우리가 한국어를 모국어로 하지만 영어도 어느 정도 친숙한 것처럼 말이다.

 

오늘날 영어에 친숙한 우리에게 '콩글리쉬'라는 단어가 있다. 콩글리쉬는 영어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순전히 한국식 영어라서 본토에서 영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그 말뜻을 알아듣지 못한다.

 

이런 현상이 1세기 당시에도 분명히 있었다. 굳이 이런 현상을 단어로 표현하자면 '히헬리쉬(?)'가 될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기록한 신약의 헬라어를 보면, 헬라어로는 말이 되지 않지만 그 단어를 히브리어로 번역하면 말이 되는 표현들이 자주 등장한다. 현대판 '콩글리쉬'의 현상인 것이다.  


헬라어 입문은 히브리어 입문보다 상대적으로 쉽다. 왜냐하면 헬라어의 알파벳이 영어의 알파벳과 비슷하게 생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읽는 것도 우리가 보통 읽는 것처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읽어나간다.

 

 

 

그러나 입문의 과정을 지나면 상황이 조금 달라진다.

 

이런 말이 있다. '히브리어의 입문은 어렵지만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히브리어는 쉬워지고, 헬라어의 입문은 쉽지만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헬라어는 어려워진다' 어떤 헬라어 알파벳은 영어 알파벳과 완전히 다른 것도 있고, 영어 알파벳과 비슷하게 생긴 알파벳도 발음에서 확연히 차이가 나는 것도 있다. 그리고 호흡을 하며 발음을 하라고 하는 '강기식', '약기식' 등의 기호와 여러 악센트 기호가 알파벳에 붙어다니면서 우리의 눈을 어지럽게 만든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언어 습득 과정의 양상을 말하는 것이지, 꼭 맞는 말은 아니다. 많이 접할수록 익숙해지는 것이 언어이기 때문이다. 어떤 언어도 처음에는 쉽지 않다. 익숙해지면 쉬워지는 것이다. 그러나 익숙해지지 않으면 어떤 언어도 금방 휘발성이 되어 날아간다.  우리가 영어를 배우면서 혹은 익히면서 실감하는 것은 가히 끝이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끝이 없다는 표현은 그 범위가 너무나 광범위하고 한정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구약의 히브리어와 신약의 헬라어는 그 본문이 한정되어 있다.

 

성경의 언어인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배우는 이유는 지금의 이스라엘 사람들과 그리스 사람들을 만나 free talking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번역 이전의 일차 문자로 읽고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이다.

 

범위가 한정 되었다는 점으로만 본다면, 어느 정도 애착을 가지고 꾸준히 읽는다면 수년 내에 전체를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더 꾸준히 시간을 들인다면 직독직해는 아니더라고 하더라도, 어느 정도 이해하며 읽을 수 있는 수준으로 되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다. 

 

Nesle-Aland NTG(27판)의 사도행전과 로마서의 일부


성경을 이차 문자로 번역된 것으로 읽는 것과 일차 문자로 읽는다는 것의 차이는, 아름다운 여인을 사진으로 보는 것과 실물로 보는 것과의 차이로 설명될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이런 비유도 썩 마음에 들지 않는다. 어쨌든 이 오묘한 차이의 맛을 알기 위해서는 많은 것을 투자해야 한다. 그 투자를 위해서 또한 많은 것을 잃어야 한다.

 

이러한 이익과 손실의 손익계산서를 이 세상 가치로 판단할 수 없을 것이다.

 

손익을 따지기가 싫다. 그런 손익을 따지다 보면 밤하늘 유난히 반짝이는 별들을 향해서도 한 숨만 내 쉬게 된다. 한 숨과 애환이 마음 속에 별이 되어진다. 그러나 온 세상의 주인이시기에 별들의 주님이시기도 한, 우리의 하나님께서는 별이 된 그 한 숨과 애환을 분명히 헤아리고 계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