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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인문학 관련

1984년

1984년

조지 오웰

 

그(윈스턴)는 진보적인 사람이다.

혹시 누군가는 '진보적'이라는 단어의 어감 때문에 거슬릴 수 있기에, 

'합리적' 혹은 '이성적'이라는 단어로 대치해보자.

그러나 단어를 달리 쓴다고 해도, 거기서 거기다.

 

어쨌든, 조지오웰의 "1984년"이라는 작품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4월. 맑고 쌀쌀한 날."

맑지만, 바람 부는 날이다. 

맑지만, 축축하고 음산한 날이다.

차분한 것 같지만 어지러운 날이다.  

문제가 없는 것 같지만, 깊이 곪아 있는 날이다.

이성적, 합리적인 것 같지만, 주술적이며 미신적인 날이다.

 

1984년은 미래소설이지만, 이 미래는 밝은 희망의 미래가 아니라 과거로 퇴행된 음산한 미래다.

모든 것을 감시받는다. 

행동도 언어도, 심지어 표정과 생각도, 소설 속 첨단 장치인 '텔레스크린'에 의해 감시받는다.

모든 것을 검열받는다.

신문도 방송도 잡지도 예술도, 심지어 과거도 검열받는다.

 

어떻게 지나간 과거도 수정되고 검열받을 수 있단 말인가?

에너지가 드는 일이지만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1950년에 6.25가 일어났다고 하더라도, 

모든 과거의 인쇄물을 폐기하고 1970년에 일어났다고 주장하면 된다.

남침이지만 북침이라고 주장하면 된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도대체 이게 뭔가?'하는 반응을 일으키지만, 

좀 더 시간이 지나면 조작된 과거를 사람들은 아무 일 없이 쉽게 받아들인다.

 

어떻게 이게 가능한 일일까?

사람들이 최고 통치자인 '빅 브라더'를 숭배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빅 브라더'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미래의 사람들은 '빅 브라더'가 없이는 자신들이 존재할 수 없다고 세뇌 당한다.

 

그러나 아주 소수의 사람들은 이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소수의 사람들은 자신과 같은 생각을 가진 자를 본능적으로 찾으려고 한다.

그래서 이 소수의 사람들이 결집하여, 민중을 계몽하고, 끝내는 '빅 브라더'를 타도하려고 한다.

윈스턴도 이 소수의 사람들 중에 한 명이다.

 

그러나 '빅 브라더'는 이 모든 것을 알고 있다.

아니 정확히 말해서, 이 실체 없는 통치자인 '빅 브라더'를 이용하여 권력을 가진 자들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은 만만한 자들이 아니다. 

'빅 브라더'보다 무서운 자들이다.

그들은 '빅 브라더'를 저항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잘 알고 있다.

 

그들은 가면을 쓴 채, '빅 브라더'를 대항하는 사람들의 냄새를 쉽게 맡고 접근한다.

저항자들의 내면을 이해하고, 저항자들의 고민도 공감한다.

그러나 저항자들이라는 증거를 확실히 찾으면, 그 때 행동을 개시한다.

밀실로 데려가는 것이다.

그리하여 윈스턴도 감옥으로 가게 된다.

그러나 감옥으로 데려가는 것은 단지 그들의 신체를 구속하려는 것이 아니다.

정신 개조는 이제 시작된다.

 

그들이 저항자들을 색출하여 감옥으로 데려가는 이유는,

저항자들이 근원적으로 저항하지 못하도록,

그들의 생각과 감정을 완전히 뜯어 고치는 데에 있다.

'빅 브라더'를 이해하며 결국은 사랑하도록 고백시키는 데에 있다.



윈스턴은 감옥에서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를 배신한다.

윈스턴을 사랑하는 여자도 감옥에서 윈스턴을 배신한다. 

이 내면의 상처를 대신하여 채울 수 있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도 배신하도록 한 '빅 브라더'를 사랑하는 것 뿐이다.

 

결국, 그들 권력자들은 목적을 성취한다.

그리하여 주인공 윈스턴은 이렇게 고백하며 소설은 끝이난다.

"그는 빅 브라더를 사랑했다"

 

사람들은 자신을 억압하는 것들에 저항한다.

그것이 권력이든 사람이든 그 무엇이든 간에 

자신의 생각을 지배하고 자신의 감정을 지배하고 자신의 의지를 지배하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지배하는 자가 지배를 받는 자보다 영리하다면, 그러한 저항은 오래가지 못한다.

지배하는 자가 지배를 받는 자보다 끈질기다면, 그러한 저항은 오래가지 못한다.

 

물론 사람들은 겉으로는 '빅 브라더'를 싫어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빅 브라더' 없이 살 수 있다는 자신감도 없다.

사람들은 '빅 브라더'에 길들여져 있다.

 

오늘날 우리 시대의 '빅 브라더'는 무엇인가?

육체적 정욕인가?

물질이 주는 만족인가? 

현세만 있는 세속주의인가? 

아니면 이것도 저것도 아닌 허무주의인가? 

아니면 비틀즈 노랫말처럼, 

임을 잃은 슬픔으로 '노르웨이의 숲'을 서성이는 자가 겪는 '상실의 시대'를 살고 있는 서글픔인가?

 

외부에서 우리를 건져주지 못했다면, 

우리도 윈스턴처럼 '빅 브라더'를 혐오했다 하더라도, 

끝내는 '빅 브라더'를 사랑하게 되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이 기본적으로 가져다주는 

감수성을 배신하고, 양심을 배신하고, 이성을 배신하고

끝내는 '빅 브라더'를 사랑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어찌 찬양하지 아니할 수 있는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나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