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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인문학 관련

나다니엘 호손

 

호손은 신비로운 인물이다. 

호손이 신비로운 인물인 것은 그가 끝까지 간직하고자 했던 '비밀'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 비밀의 실체에 접근하려 했다.

기자들과 평론가들, 혹은 익명의 이웃들은 그 소문이 과연 사실이 아닐까 짐작했다.

소문이 어떻든, 가장 괴로워하던 이는 소문의 실체를 쥐고 있는 호손 자신일 것이다.

 

그는 평생토록 비밀을 간직하고자 했다. 

그 비밀을 간직하길 원했던 것은 그것이 죄였기 때문이다. 

고백으로 해방감을 가진다는 것은 모든 이에게 허락된 것이 아니다.

고백을 한다고 해서, 모든 이들에게 이해와 동정을 얻어내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고백 후에 닥칠 사회적인 후폭풍을 감당할 용기가 없는 자들은 고백을 꺼려하는 것이다.

호손도 이 점에서는 나약한 인간이다.

 

해방감을 얻기보다는 비밀이라는 베일로 자신을 감싸면서 해방감을 누린다. 

진정한 해방은 죽음 너머에서 하나님께 고백될 것이라는 소망을 가지면서.

'목사의 검은 베일'이라는 작품은 호손의 이러한 심리를 가장 잘 반영한 작품이다.

가까운 자들은 자기에게 만은 그 비밀이 누설이 되길 바란다.

그러나 이 비밀은 결코 밝혀지지 않는다.

사람들은 죽음을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 검은 베일을 쓴 목사가 마음을 바꾸길 바랬겠지만,

소설 속의 목사는 끝까지  그 비밀을 누설하지 않는다. 

소설 속의 목사는 작가 나다니엘 호손의 자화상인 것이다. 

 

그러나 나다니엘 호손은 수군거리는 청중들에게 숨통을 터주기 위하여 다른 자화상을 제공한다.

'주홍글자(주홍글씨)'에서 드디어 베일을 벗는 주인공을 만들어낸다.

그 주인공도 목사라는 직분을 가졌다.

혹시라도 오해하지 말자!

이 소설에 묘사된 모든 인물들은 선악의 구도로 명확하게 나누어져 있지 않다.

주홍글자는 흔히 청교도들의 외식과 위선에 대한 풍자로 말하는 자들도 있지만,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다.

죄로 억눌린 신자의 내면을 읽는 교과서이다.

그러므로 회심하지 않은 자들은 결코 이 책을 이해할 수 없다.

문자를 눈으로 핥을 뿐이지, 가슴으로 책장을 넘기지는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작가 호손이 주홍글자라는 소설로 자신의 비밀을 구체화한 것이 아니다.

여전히 호손의 비밀은 간직되어져 있다. 

오히려 비밀은 더 교묘히 미끄러져 사람들의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숨어버린다.

독자들 중에는 호손이 간직한 비밀의 실체가 결코 추상적일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 자들도 있다.

그 비밀이 뭘까? 그 죄가 뭘까? 도둑질을 말하는 것일까? 살인을 말하는 것일까? 

아니면 가히 상상할 수 없는 그 무엇일까?

 

독자들의 궁금증이 더해갈 때마다 호손은 어쩌면 더 숨고 싶었을 것이다.

'차라리 말해 버리면 좋을 것을,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다면 좋았을 것을...' 

이러한 신음을 얼마나 수없이 반복했는지 모를 일이다. 

 

엄격한 청교도의 사회에서 그는 낯선 존재였을지 모른다. 

그는 분명히 회심한 구원받은 자였을 터이지만, 

신대륙의 땅에서 종교의 자유를 얻은 청교도의 후손이었지만,

종교적 틀과 규범, 전통에 호손은 자유하지 못했다.

그는 분명히 구원받았겠지만(왜냐하면 회심하지 않는 자라면 도저히 이런 류의 내적 갈등을 쓸 수가 없다고 생각되니까)

이 땅에서는 자신의 구원을 위해 여전히 몸무림을 쳤다. 

글은 그에게 구원의 도구였다.

 

그는 완성되고 성화되고 싶었겠지만, 이 땅의 현실에서 그는 구현될 수 없었다.

고위 공직자로 재직도 하며, 유명세도 타며, 대통령의 친구가 되기도 하였지만, 

그의 마음에는 자신 만이 간직해야 할 '비밀'로 평생을 멍들어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제 그는 노년이 되어 그의 마지막 소설로 자신을 구현한다.

'큰 바위 얼굴'

소설 속 어니스트는 큰 바위 얼굴에 가장 근접한 인물이 되었다. 

그러나 어니스트는 자신보다 훨씬 적합한 인물이 나올 것이라 말하며 소설은 끝이 난다.

 

 

호손에게 있어 큰 바위 얼굴은 자신이 되고자 했던 누군가이며, 혹은 자신이 닮고자 했던 그 누군가이다.

죄를 고백할 수 있는 더 성화된 자신일 수 있으며,

그 죄를 평생의 비밀로 간직하는 자의 아픔을 이해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실 수도 있다. 

 

교과서적인 답을 내놓길 좋아하는 '자칭' 청교도를 좋아하는 무리가 한국교회에 있다.

그들은 한국교회의 부패한 시류에 영합하지 않는다는 자부심으로 부각되길 원한다.

그러면서도 이렇게 말하기를 좋아하는 자들도 있다.

'나는 청교도를 좋아하지만, 청교도를 좋아하는 자들은 좋아하지 않는다'

참으로 괴상한 말이다. 그러나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그들은 언제나 이런식으로 이분법적으로 사람들을 나누길 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들과 같지 않은 사람 냄새 나는 청교도를 만났다. 

그는 진정한 청교도, 나다니엘 호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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